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타노 다케시 (문단 편집) === 영화 감독으로서 재기 ===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의 여파로 소속사인 [[오오타 프로덕션]]에서 해고당할 위기에 처하자 기타노 다케시는 [[1988년]] 소속사를 나와서 아예 직접 자신의 소속사 오피스 기타노를 설립한다. 소속사 설립 후 다케시는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으로 인해 좁아진 방송계에서의 입지를 타개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. 이 즈음 비트 다케시는 [[그 남자 흉폭하다]]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었는데[* 비트 다케시는 1982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기자로서도 활동하기 시작했고 1983년에 개봉한 [[데이비드 보위]], [[사카모토 류이치]]가 주연으로 출연하고 [[오시마 나기사]] 감독이 연출을 맡은 [[전장의 크리스마스]]에 주조연급 인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데뷔했다.] 본래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던 [[후카사쿠 킨지]] 감독이 제작사와의 마찰로 감독직을 하차하여 영화 제작이 엎어질 상황에 처하고 만다. 그러자 해당 영화로 재기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던 다케시는 자신이 아마추어 [[화가]]라는 점을 어필하며 제작사에게 자신이 영화를 직접 감독해서 완성시키겠다는 제안을 하게 되고 킨지 감독의 추천으로 제작사가 제안을 승낙하자 비트 다케시는 [[1989년]] [[그 남자 흉폭하다]]를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. 다케시는 자신이 영화의 감독으로 확정되고 감독으로서 처음으로 촬영 현장에 출근했을 때 [[각목]]을 들고 나타나 영화 스탭들 전부를 집결시킨 뒤 그들 앞에서 각목을 휘두르며 "나는 앞으로 이 영화의 감독이다. 그러니 나를 개그맨이라고 만만하게 여기다가는 큰코다칠 거다."라고 큰소리로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.[[https://gall.dcinside.com/mgallery/board/view/?id=nouvellevague&no=1465744&s_type=search_subject_memo&s_keyword=.EA.B8.B0.ED.83.80.EB.85.B8.20&page=1|#]] [[그 남자 흉폭하다]]는 흥행에 성공했고 다케시는 이를 발판으로 [[3-4×10월]](月) (1990), [[그 여름, 가장 조용한 바다]](あの夏、いちばん静かな海) (1991) 등을 연이어 감독하면서 영화 감독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. [[소나티네(영화)|소나티네]] (1993)는 [[칸 영화제]]에 출품되어 유럽 등 해외에서까지 인정받았다. 그러나 이런 성공이 쉽게 찾아오지는 않았다. 한창 개그맨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절에는 "골때리게 웃기는 천재 개그맨"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, 프라이데이 습격 사건 이후 갑자기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는 소식을 발표하자 수 년 동안 대중들의 분노어린 평가와 숱한 조롱을 받은 것. 후일 다케시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"대중들에게 각인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서 수 년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."고 회상했다. 또한 이 시기 다케시는 [[사이비 종교]]인 [[옴진리교]]의 교주 [[아사하라 쇼코]]와 사적으로 친한 관계였으며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Aj7QXqJcwz4|1991년 12월에는 기타노 다케시의 소개로 아사하라 쇼코가 방송에 나와 다케시와 대담을 나누는 특집 방송을 진행하기까지 했다.]] 옴진리교가 [[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]]을 일으킨 이후 그런 과거가 논란이 되자 다케시는 "나는 옴진리교의 출가 신도[* 일본에서 한창 옴진리교가 유행할때, 멀쩡히 학교생활 회사생활 하던 이들이 모든것을 다 내려놓고 옴진리교로 출가하는 문제가 있었다.]가 아니다. 그저 옴진리교의 교주 아사하라 쇼코가 운영하는 요가 교습소에서 어머니의 병과 자신의 고질병인 신경통[* 비트 다케시는 무명 시절의 사고로 신경을 다쳐서 80년대까지 몸을 움찔대며 비트는 특유의 버릇으로 유명했는데 1992년 즈음부터 해당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다.]을 치료받은 것이 고마워서 그와 연락을 종종 했던 것에 불과했다. 개인적으로는 아사하라 쇼코를 그냥 좀 재밌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. 옴진리교가 전파를 타게 도와달라는 아사하라 쇼코의 간곡한 부탁에 넘어간 것과 옴진리교가 그렇게 위험한 종교였는지 몰랐던 것은 반성하지만 따지고보면 나도 옴진리교에 속은 피해자 중 한사람이다."라며 결백을 호소하기도 했다. [[1994년]] [[8월 2일]], 비트 다케시는 다케시 군단과의 연회가 끝난 후 [[음주운전|술에 만취한채로 오토바이를 타고]] [[내연녀]]집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를 일으켜서 중상을 입는다. 사고 당시 다케시는 살아있다는게 기적일 정도로 상태가 처참했으며 도로 가로등 한가운데 피투성이로 쓰러진 그를 맞은편 차선에 달려오던 택시기사가 발견한 덕에 구사일생했다.[* 훗날 다케시는 "만약 내가 그대로 방치되었다면 뒷차에 깔려 죽었을것이다."라는 씁쓸한 농담을 했다.] 당시 사고로 함몰된 그의 얼굴뼈 전체를 복구하기 위해 긴급 프로젝트와 의료진이 투입되었다.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지만 후유증으로 그는 얼굴 일부가 마비되어 표정을 제대로 짓지 못하게 된 것을 물론, 후각 신경이 마비되고 안구의 초점이 흐려졌으며 극심한 두통에까지 시달린다고 한다.[* 2020년 현재까지도 후유증이 남은 것으로 추정되며 '자고 일어나면 병원이 아닐까' 하는 걱정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한다고 한다.] [[https://www.youtube.com/watch?v=cxAhu7glRNg|당시 병원에서 이루어진 기자회견 영상(한글자막)]] 또한 '''다시 [[불륜]]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서 [[음주운전]]까지 했다'''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중들에게 큰 지탄을 받았다. 아내와도 이혼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. 이 일 이후로 영화 감독으로서의 성향이 크게 바뀐다. 사고 전에는 죽음이나 자살을 미화하는 장면이 영화에 많이 나오곤 했는데 이 이후로는 그런 묘사가 많이 사라지게 된다. 다케시 본인 말로는 이 사건 전에는 죽음에 대해서 동경이나 환상이 있었는데 사고 이후 그게 아닌 걸 깨달았다고. [[1995년]] 여름, 비트 다케시는 제 9회 'FNS의 날 1억 2500만명의 슈퍼 꿈의 열도'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다시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고 [[1996년]], 《[[키즈 리턴]]》을 발표하며 영화 감독으로 재기하였다. [[1997년]]에는 《[[HANA-BI|하나비]]》로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. 참고로 하나비는 일본 문화가 개방된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개봉한 첫 번째 일본 영화였다.[* 일본 문화 개방 초기에는 극장에 개봉 가능한 일본 영화는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영화로 제한되어 있었다.] [[하나비(영화)|하나비]] 개봉 후 한 인터뷰에서 '[[가족]]이란 남들이 안 본다면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'라는 충공깽스러운 발언을 했던 것이 은근히 유명하다. [[1999년]]에는 《[[기쿠지로의 여름]](菊次郎の夏)》으로 칸영화제 본선에 진출하였다. 이러한 비평적 성공으로 기타노 다케시는 [[1990년대]]의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. 90년대에 다케시가 연출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한다. 영화 감독 [[구로사와 아키라]], [[장뤽 고다르]][* 일본 방문 당시 다케시를 훌륭하다고 평했고, 하나비를 좋아한다고 말했다. [[https://eiga.com/news/20021029/15/|#]]], [[쿠엔틴 타란티노]][* 타란티노의 소나티네 [[https://youtu.be/7Uxjk3lY5Do|해설]]], 평론가 [[하스미 시게히코]][* 하스미 시게히코는 다케시 영화의 [[https://mube2.jp/20100616/281|평론]]을 쓰기도 했다. [[https://m.blog.naver.com/PostView.naver?blogId=porkpitch&logNo=222436160043&referrerCode=0&searchKeyword=%EB%8B%A4%EC%BC%80%EC%8B%9C|번역]]], [[요도가와 나가하루]] 등이 그의 작품에 극찬을 보냈으며,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 평론지 [[카예 뒤 시네마]]는 하나비와 소나티네를 올해의 영화로 꼽기도 했다. 2019년 [[키네마 준보]]가 선정한 '90년대 최고의 일본 영화 순위'에서도 다케시의 영화가 일곱 편 중 다섯 편이나 들어갔다. [[https://cinema1987.org/home/best10/3/1990s_best.html|#]] [[2003년]] 개봉된 장님 검객을 주연으로 한 《[[자토이치]]》 또한 해외에서 호평을 받으며 다케시는 일본의 거장 감독으로 완전히 자리잡게 된다. [[2010년]]에는 오랜만에 야쿠자 영화 《[[아웃레이지(영화)|아웃레이지]]》를 감독했다. 이 영화는 [[부산국제영화제]]에도 소개되었다. 그러나 영화 감독으로서의 성공과는 반대로 개그맨으로서의 커리어는 오토바이 음주운전 사고 이후부터 점점 하락세를 타고 있었다. [[1996년]]에는 자신의 칸무리 방송 여러개가 종영되는 아품을 겪기도 했다. 이후 비트 다케시는 작품성이 높은 평가를 받는 영화 감독이라는 타이틀과 [[1989년]]부터 방영을 시작한 시사 정치 쇼 '비트 다케시의 TV 태클'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발판삼아서 [[1997년]]부터 [[후지 테레비|후지TV]]에서 방영 하고 있는 프로그램인 기적체험! 언빌리버블(奇跡体験!アンビリバボー)의 스토리텔러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개그맨 활동 뿐만 아니라 종합방송인의 커리어도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. [[2015년]] [[나홍진]] 감독의 영화 [[곡성(영화)|곡성]]에 외지인 역으로 출연해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다. 당시 다케시는 나홍진 감독에게 "미안하지만 못할 것 같습니다. 나에게는 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."라고 편지를 통해 정중히 거절의사를 밝혔다고 한다. 대신 일본의 중견배우 [[쿠니무라 준]]이 캐스팅되었다. 재미있게도 쿠니무라 준은 기타노 다케시가 출연한 [[피와 뼈]], 연출도 한 [[아웃레이지(영화)|아웃레이지]]에 출연한 바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